오는 14일 낙안읍성에서 음악제 열어 무고하게 희생된 1만3000 영혼 위무
여순사건으로 ‘전라도=빨갱이’ 오명 뒤집어써…진실 알아야 좌우이념대결 종식

어린 시절 필자는 사랑방에서 자랐다. ‘귀한 차남’(형님 1명과 누님 3명)으로 태어나서인지, 어려서부터 사랑방에서 조부님과 생활을 같이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조부님이 준 용돈으로 학용품도 사고 과자도 사먹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사랑방 뒤에는 식객들이 머무는 방이 있다. 그래서 풍수지리, 사주명리학, 관상 등등의 전문가들이 숱하게 머물렀다. 조부님과 그들이 나눈 대화 내용이 어린 필자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그중에서 관심을 가진 대목은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활동한 내용이다. 당시 조부님은 호남 지방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이끌고 지금의 북한 지역에 가서 압록강 수풍댐 건설 등 대규모 토목공사에 참여해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돈을 집안 형님이 되는 백강(白岡) 조경한((趙擎韓) 전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기며 활동했던 이야기는 지금도 필자의 귀에 생생하다. 백강은 그 시절 지청천(池靑天)·김창환(金昌煥)·황학수(黃學秀) 등과 함께 한국독립군을 일으켜 만주 각지에서 100회 이상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었던 항일독립투사였다.

어린 시절 조부님을 뵐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조부님의 윗입술이 단층이 나 있었다. 큰 상처를 입었던 흔적이다. 그 원인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다닐 때다. 주암면 오산리 시골집을 떠나 순천 동외동 집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자 어머님께서 여순사건 당시의 아픈 이야기를 들려줬다. 참고로 조부님과 아버님은 여순사건 당시의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조부님이 처절하게 당한 사연은 이렇다.

조부님은 1948년 10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이른바 ‘빨치산’들로부터 몽둥이로 집단구타를 당했다. 그들이 요구한 협조와 지원을 들어주지 않았을 뿐더러 “공산주의자들은 불효집단”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역사회(향교, 문중 등)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조부님은 “부모를 동무라고 부르는 집단은 절대로 인정할 수도 협조할 수도 없다”며 좌익계열 인사들을 크게 질책했었다고 한다.

몽둥이로 무수히 얻어맞은 조부님은 실신하게 됐고, 이를 목격한 조모님께서 가마니로 조부님을 덮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곡(哭)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좌익계열 인사들은 조부님이 사망한 것으로 알고 철수했다는 것. 그리고 나서 온 몸에서 피를 흘리고 실신한 조부님을 집안 조카들이 교대로 업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가르며 백리 길을 달려가 순천 시내 남약국에서 목숨을 건졌다. 40일간 대롱을 통해 추어탕을 드시고 기사회생하신 것이다. 그리고 전 가족이 순천 금곡동으로 이사해 3년을 숨어서 지냈다. 실제로 그날 오산리에선 마을 유지 2명이 그들의 구타에 의해 사망했다. 단지 조부님만 조모님의 지혜로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아미산 자락의 오산리는 150호 정도가 살고 있었던 큰 마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부님은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원망하지도 않았다. 경찰들이 구타한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미산과 조계산 일대를 집중 포격해 빨치산을 전멸하겠다는 경찰과 군대를 완강하게 만류했다고 한다. 93세로 영면하기 전까지 그날의 사건을 단 한 차례도 꺼내지 않았다. 평생 가슴에 묻어두고 가신 것이다. 참고로 조부님은 항일독립투사요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의 계열로 분류된다. 심산이 성균관대학교 건립자금을 모금할 때 조부님이 논 100마지기에 달하는 향교 재산과 사재를 털어 기부했었을 정도다. 당시 심산은 조부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고 “고맙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승만과는 적대적 관계에 있었고 순천의 조씨 문중은 해방이후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전개했었다.

필자는 대학시절부터 ‘왜 조부님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보복하지 않았을까’를 줄곧 생각했었다. 당시 여순사건으로 인해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도 모른 채 희생당한 양민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즉, 우익보다 좌익의 희생자들이 많았고, 그 보다 무고한 시민들이 더 많이 희생됐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당한 아픔을 영원히 묻어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여순사건은 얼마나 참혹한 비극적 사건이었는가. 아직도 그 실체적 진실이 역사의 베일에 가려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여순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1948년 10월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 전남 동부지역을 일시 점령했다. 14연대의 김지회·홍순석·이기종 등이 주축이 된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가 발표한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이런 호소문은 여수, 순천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폭력적 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이어졌다. 여순사건을 ‘여순민중항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자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토벌군)을 투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1월4일 특별담화를 통해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남녀 아동까지라도’라는 표현은 섬뜩하다. 대통령이라는 자가 어떻게 어린이들까지도 제거하라고 지시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린이들도 ‘빨갱이’라는 말인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다.

이에 따라 진압군은 여수, 순천의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했다.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해 1만3000명에 달하는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진압군에 저항한 좌익 계열의 일부 과격 인사들은 지역 유지들의 동참과 지원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한 유지들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다. 그러다보니 좌우 진영 모두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우린 너무 몰랐다’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여순민중항쟁으로 이승만은 강고한 우익체제를 구축했다. 예비검속, 연좌제를 실시했고, 보도연맹을 창설했다(30만 이상을 죽임). 군대로부터 완벽히 좌익세력을 청산하는 숙군사업을 완성했으며, 반민특위활동에 밀린 친일경찰까지도 대거 군대로 들어갔다. (중략) 군대가 체제수호의 수단적 기구로 변모하여 부패하였다(박정희는 이러한 군대의 부패를 청산하는 정풍운동의 리더로서 결국 쿠데타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중략) 대학에는 학도호국단이 창설되었고, 주한미군철수가 6개월 정도 연기되었고,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다.”

국내 정치적 기반이 허약했던 이승만이 여순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함으로써 김구 선생 등 정적을 제거하고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정적이었던 조봉암(曺奉巖) 진보당 당수를 ‘빨갱이’로 몰아 제거했던 것이 그 단적이 사례다.

물론 여순사건 배후에는 남로당 세력이 엄존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좁혀서 14연대에도 남로당 인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배후의 핵심인물이 박정희 소령이었다. 그는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순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다. 여순사건 직후 시작된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밝혀져 1948년 11월11일 체포됐다.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의 조치를 받았다. 박정희는 정보국에서 남로당 조직과 동료들을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지원을 받아 사형을 면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과 박정희는 모두 여순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역으로 여수와 순천 지역은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으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았던 곳이다. ‘전라도=빨갱이’이라는 반역사적 오명을 뒤집어썼던 출발점이기도 하다. 결국 여순사건은 독재정권의 호도에 의해 대한민국의 좌우 이념대결을 확대·심화시킨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실체적 진실은 역사의 뒤편에 묻힌 채 71년이 흘러왔다. 좌우 이념도도 모른 채 무고하게 희생당한 1만3000 영혼은 지금도 구천에서 떠돌고 있다. 피맺힌 한을 품고서 해원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그 해원의 날이 왔다. 2019년 4월14일 오후 3시. 전남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 객사에서 여순사건영상기록위원회 주관으로 ‘제1회 여순사건해원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여순사건 당시 낙안 오금재 넘어 9개 마을 주민 대부분이 학살돼 고동산과 금전산 골짜기에 집단적으로 매장됐는데, 그 원혼들을 해원시키기 위해 작은 음악회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는 너무 몰랐다. 우리는 너무 조용했다”는 도올의 외침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돼야 한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여순사건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그래야 이 땅에서 좌우 이념대결이 종식될 수 있다.

조한규 중소기업신문회장·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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