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적 마찰 풀기 위해 자유무역주의를 심각하게 훼손
정치·외교적인 문제와 별개로 국제교역 질서 존중되어야

일본의 수출 규제로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와 장비 국산화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박영선 중기부장관과 최태원 SK 회장이 대·중소기업 협력관계를 둘러싸고 설전을 벌여 관심을 끌고 있다. 박 장관은 지난 18일 제주에서 열린 ‘제44회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국내 중소기업도 불화수소를 만들 수 있는데 대기업이 안 사준다"면서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협력해 나갈 것을 주문했다. 이에 최 회장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대기업이 국내산을 쓰지 않는 것은 품질과 수준 차이 때문이지, 일부러 안 쓰는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최 회장의 발언을 접한 박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20년 전부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R&D투자를 하고 밀어주고 끌어주고 했다면 지금의 상황은 어땠을까"라고 재반박했다. 대·중소기업이 협력해 미리 대비했다면 일본의 공격을 쉽게 극복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며칠 후 박장관이 불화수소 논쟁은 “닭이 먼저냐 달걀과 먼저냐”의 문제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동 투자해 개발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중이라며 마무리했지만, 주무 장관과 대기업 총수가 발등에 불 떨어진 경제 현안을 두고 설전을 벌인 것은 이례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서 박장관이 대·중소기업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지금과 같은 사태를 가져왔다고 지적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일본 수출 규제의 타깃이 되고 있는 반도체 기업의 수장이 우리 중소기업의 현실에 부품·소재의 국산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밝힌 것 또한 나름 솔직한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둘 다 맞고, 둘 다 틀렸다.

먼저 박장관이 언급한 대기업이 중소협력업체들과 잘 협력하여 부품·소재산업의 경쟁력을 키웠어야 한다는 의견은 원론적으로 맞다. 그동안 수많은 부품·소재 품목들이 수입대체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만큼, 오늘날과 같은 사태를 미연에 대비하지 못한 대기업의 역할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생산의 효율성을 고려해야 한다. 국산화가 가능한 품목이 있는가하면, 일부 품목은 기술적 한계 내지는 규모의 경제로 인해 해외에서 수입해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박장관이 기업의 세부적인 비즈니스 측면을 간과했다고 할 수 있다.

최 회장은 불화수소의 경우 “공정에 맞는 불화수소가 나와야 하지만 우리 내부에서는 그 정도까지의 디테일은 들어가지 못했다”며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제품을 반도체 생산에 적용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초정밀 공정을 요구하는 반도체 생산에 신뢰가 보장된 제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 회장의 발언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언론사가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초고순도 불화수소’를 만드는 기술이 국내에서 8년 전에 개발됐지만 대기업이 채택하지 않아 양산에  실패했다는 기사를 냈다. 최 회장의 발언이 머쓱해졌다. 불화수소 외에도 제품 개발에는 성공했으나 대기업의 외면으로 사장된 기술은 많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대기업도 이번 사태에서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품·소재산업을 육성한다고 해서 전 품목을 국산화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이는 자유무역주의 정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수출을 규제한 3개 품목은 일본이 전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을 지닌 제품이다. 따라서 그동안 우리 기업이 이 제품들을 수입해 쓰는 것은 한국과 일본 모두가 ‘win-win’하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외교적 마찰을 풀기 위해 자유무역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수준의 무리수를 둔 일본에 있다. 블룸버그 통신도 22일 기사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를 “아베 총리가 정치적인 분쟁을 해결하려고 통상조치를 오용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글로벌 무역질서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존중의 박수갈채를 받은 지도자로서 특히 위선적인 행태"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다. 세계 경제는 자유무역주의를 기반으로 국제 분업 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조화롭게 돌아가고 있다. 정치외교적인 문제와 별개로 국제교역 질서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일본은 당장 수출 규제 조치를 거두어들여야 할 것이다.

이원호 논설위원·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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