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아랍 독립 국가 약속하고도 유대인에게도 똑같은 약속
美·蘇, 중동전쟁서 이스라엘 지원하고 아랍에만 금수조치
지소미아 관련 미국 일방적 압력 떨치고 자주국가 이뤄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절정을 치닫고 있다. 지난 12일(현지시간)부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23명이 숨지자 이란이 후원하는 팔레스타인의 무장정파 ‘이슬라믹 지하드’도 13일 새벽까지 이스라엘을 겨냥해 로켓포 200여발을 발사하면서 이스라엘인 여러 명이 다쳤다.

이들의 갈등은 서기 70년 유대-로마 전쟁에서 로마에 패한 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쫓겨나 유럽 여러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 운동이 전개되면서 시작된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시오니즘 운동을 통해 많은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를 단행했다.

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7년 11월,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통치하고 있던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가 ‘밸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했다. 이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던 유대인들로부터 전쟁 비용을 끌어 모으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미 이곳에 살던 아랍인들에게 국가 건설을 약속했던 영국으로서는 이중플레이를 펼친 것이었다.

이후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4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차 이민은 1881년 러시아 왕자 암살에 유대인이 연루됐다는 의혹 때문에 러시아 거주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벌어지자 발생했다. 2차 이주는 1900년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1914년까지였다. 러시아 혁명으로 또 다시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자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간 것이다. 3차 이주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서 1924년 사이에 일어났다. 기업가들이 많았고, 대부분 농촌이 아닌 도시로 들어갔다. 4차 이주는 1924년에서 1936년 사이에 일어났고,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았다.

이처럼 팔레스타인으로 몰려간 유대인들은 궁핍한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땅을 계속 사들였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땅이 확대되면서 양측 간에 충돌이 빈번했다. 양측의 갈등이 심화되자 이곳을 식민 지배하던 영국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해 2차 대전 이후 이곳을 떠나며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UN에 이 문제를 떠맡겼다.

급기야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고, 그 직후 이집트와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의 공격으로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됐다. 압도적인 무력을 갖춘 아랍동맹국은 병력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이스라엘에 손쉽게 승리를 거둘 것으로 낙관했지만 예상 외로 장기전으로 흐르면서 결국 한달 간의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 휴전 합의는 전세가 이스라엘 쪽으로 기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 기간 동안 미국, 소련 등 강국들은 전쟁이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양측에 대한 무기 금수조치를 취한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아랍 동맹국들만 이 조치의 적용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유력한 유대인들을 통해 소련과 미극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고, 휴전이 깨진 이후 일방적으로 아랍동맹군을 몰아붙인 끝에 정전협정을 요구했다.

강대국들의 이중플레이에 또 다시 당한 아랍 국가들로서는 정전협정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1949년에 시작된 정전협정에 따라 70만명이 넘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하거나 피난에 나서 요르단 등 인근 국가로 이주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지만 번번이 강대국들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이어지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미국의 일방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공세가 더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세계 전역에서 강대국들의 입김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례이기 때문에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강대국들은 어느 양측 간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쪽을 편드는 이중플레이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사실 더 큰 문제는 압박에 굴복한 아랍권의 분열이다. 강대국의 이중플레이에도 불구하고 아랍권이 단결했다면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없었을 수도 있다. 

최근 한국과 일본 간 지소미아 종료 시점에서 드러나고 있는 미국의 압박도 이중플레이의 폐해를 드러내준다. 그 원인이 된 일본의 경제 도발은 도외시한 채 미국의 이익에만 집착해 지소미아를 종료하지 말라고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일부 집단도 지소미아 연장론을 펼치며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이는 팔레스타인과 같은 비극을 자초하는 짓에 다름 아니다.

국제 사회의 교류는 상호이익이 있을 때만 의미를 지닌다. 이익도 지키지 못한 채 힘에 굴복하면 다음에도 똑같은 일이 재발할 것이다. 한일 지소미아와 관련해 미국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전 국민이 합심해 원칙대로 나아간다면 한국은 강력한 자주국가로서의 이미지를 심어줄 것이고 미국의 이중플레이도 멈추게 될 것이다.

곽영완 국제·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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