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웨어에서 의료과 식품 등 디지털 융합으로 발전
새로운 산업 활성화 위해 규제보다는 열린 자세 필요

매년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미국가전협회 주관으로 소비자가전제품전시회(CES)가 개최된다. 통상 CES로 불리는데 1967년 처음 개최된 이래 첨단 IT 기술 동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시회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디지털 기술 융합이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자동차와 같은 모빌리티 관련 기업의 참여가 늘어나는 등 IT 영역 밖으로도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CES는 관련 산업 종사자들을 위해 비공개로 진행되지만 전시 기간 동안 언론을 통해 발표되는 다양한 정보에 일반인들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금년에는 161개국 4500여개 업체가 참여했는데, 이들이 선보인 기술 중에서 주목해야 할 5대 기술 트렌드로 전문가들은 ▲디지털 치료 ▲플라잉 카 ▲미래 식품 ▲안면인식 ▲로봇을 꼽고 있다. 금년에 소개된 트렌드는 이전에 비해 특징적인 현상이 하나 있다. 지금까지 첨단 가술 분야와 거리가 있다고 여겨졌던 식품, 건강, 치료 등의 산업 분야가 IT 전시회의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2019년에 주목 받았던 분야가 5G, 자율주행 자동차, 접이식 디스플레이, 8K TV 등이었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확실하게 트렌드의 변화가 감지된다.

새로운 트렌드가 의미하는 바는 CES가 더 이상은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한 첨단 IT 제품 소개하는 전시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이미 몇 년 전 자동차 회사가 참여하면서부터 IT 산업의 지형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 의료, 식품 분야 등이 전면에 나서면서 향후 CES가 디지털 융합을 바탕으로 다양한 산업이 접목되거나 상호 적용되는 종합 전시회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말로만 해왔던 4차 산업혁명과 이에 따른 사회·경제·문화적 변혁기가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동안 우리가 CES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체로 애플이나 구글 등에서 발표하는 첨단 IT 기술과 삼성, LG가 소니 등 일본 IT 기업보다 앞선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는 자부심에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올해 CES 트렌드를 살펴보면 이제 더 이상 전시회에 소개되는 다양한 첨단 기술과 제품에 감탄만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CES 2020을 계기로 첨단 산업이 가져올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는지 짚어 보아야 한다. 디지털 기술의 융합이 다양한 산업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기존 산업과 새로운 산업의 충돌 가능성은 없는지 살펴보고, 새롭게 탄생하는 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 철폐를 위한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지난해 ‘타다 사태’를 보면 아직까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타다 사태는 혁신 성장과 새로운 산업을 육성한다는 구호만 요란했을 뿐 정부와 정치권, 기존 산업의 이기주의적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타다’가 법망을 피해간 콜택시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공유경제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혁신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장되고 말았다. 타다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 부처 간 엇박자와 표심을 의식한 정치권의 구태가 계속된다면 제2, 제 3의 타다 사태는 불을 보듯 뻔하다.

아산나눔재단에서 발간한 ‘2017 스타트업코리아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100대 스타트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한국 법률을 적용하면 30% 정도만 자유롭게 사업 할 수 있을 정도로 규제가 심하다. 물론 정부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규제 샌드박스를 시행하는 등의 노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타다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새로운 산업에 대한 정책 당국의 낮은 인식과 뿌리 깊은 집단 이기주의를 생각하면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CES 2020의 트렌드가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는 기술의 발달에 경제가 얼마나 잘 적응해 나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했던 개념이다. 바로 지금이 창조적 파괴의 시대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과감하게 규제를 철폐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산업이 출현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이익 집단 간 충돌에 대해 여기저기 눈치를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개입해 조정하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원호 논설위원·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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